낙원상가에 관하여 :

자- 떠나자 낙원상가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낙원 악기 상가

낙원동에 세워진
세계 최대 악기상가의 시작

낙원악기상가는 명실공히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악기상점입니다. 낙원상가 2층과 3층에 걸쳐 300여 악기 전문점들이 들어서 있는데요, 악기 품목만을 취급하는 상가로는 그 어디와도 비교하기 힘든 규모 이지요. 거기에 4층과 5층에는 악기 관련 사무실들과 합주연습실, 야외 공연장(아트라운지 멋진하늘) 등이 자리하고 있으니 악기를 비롯한 음악에 관련한 하드웨어 기반으로는 가장 탄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낙원악기상가의 이런 음악적 토대는 40년이 훌쩍 넘는 긴 세월 동안 쌓여온 결과입니다. 악기 상점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악사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일반인들이 악기에 취미를 가지면서 차츰차츰 형성되어 온 산물이지요. 한 장인(匠人)이 탄생하기까지 필요했던 기나긴 세월만큼 낙원악기 상가도 악기와 음악의 장인으로 자리를 공고히 하기까지 필수불가결 한 시간을 거쳐 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시작은
어떻게 이루어진 걸까요?

사실 누군가의 계획에 의해서 착착 진행된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칼로 자르는 듯한 정확한 설명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정황을 기반으로 충분히 이해할 만한 설명은 드릴 수 있겠네요.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여흥

지금의 낙원동, 익선동, 인사동 등의 종로 일대는 조선시대 때 술집과 기방 같은 여흥의 문화가 자리하고 있던 곳입니다. 이 일대는 창덕궁 앞길로 해서 그 옆 피맛길(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이 가마나 말을 타고 행차하는 행렬을 피하는 길)과 그 주변들인데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에 자연스레 먹거리들과 주막들이, 그리고 기방들이 생겨났던 것이지요. 이 일대의 이런 문화는 일제시절과 광복 이후에도 유명 사교클럽 등으로 이어지게 됐고, 이를 기반으로 이 일대에 음악인들과 연예인들이 많이 오가게 되었습니다. 

해방, 전쟁, 아수라장 같았던

일제시절 이후 이런 문화가 한 번 더 탄력을 받게 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나라가 해방을 맞이하고 난 뒤 사회는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다시금 사회를 정비하는데 쉽지 않은 진통을 겪어야 했지요. 더군다나 해방 후 몇 년 되지도 않아 6.25전쟁까지 발발했으니 상황은 더욱 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의 상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같았지요. 이전까지 대대로 내려오던 양반 위주의 신분체계도 무너졌고, 누구 할 것 없이 다들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엄청난 고민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곳에서 예전 주인과 노비가 다시 만납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주종 관계는 아니지요. 그것까지는 괜찮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노비였던 이가 빠르게 재력을 모아가고, 주인이었던 양반은 계속해서 힘들게 살아간다면, 이제 상황은 역전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노비였던 이로부터 받았을 무시가 처음에는 은근했을 지언정 갈수록 노골적으로 바뀌어 갔을 수도 있겠지요. 조금 단순하게 예를 들긴 했지만 당시 상황에서 이와 같은 반상(班常)의 역전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었고, 이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습니다.

꼭 반상의 역전까지는 아니어도 대부분이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 자체로 삶의 압박이 심한 시절이었고, 사회적으로도 매우 불안한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의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술 한 잔과 음악 한 소절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지요. 조선시대 때부터 술과 음악이 끊이지 않던 종로 일대는 이 어려운 시절에도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계속해서 그 모습을 유지해 갔지요.

경제 성장, 그러나 한(恨)이 쌓이던

1960년대 이후 경제가 차츰 발전하면서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경제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정치적인 문제의 복잡한 사항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경제적인 측면은 분명 나아지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이 경제성장이라는 측면이 오히려 사람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민주화에 대한 끊임없는 부르짖음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무력으로 인한 억압을 받았고, 보통 사람들은 그저 잠잠히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울분 역시 술과 음악에 더불어 토해졌고, 시장은 오히려 경제적 성장과 맞물려 점차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종로 일대의 여흥은 갈수록 커져간 것이지요.  

한국 대중음악의 폭발

1960년대 초 세계적인 그룹 비틀즈가 등장한 이후1960~70년 대에 전세계적으로 록이 절정에 이르렀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록 밴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주로 미8군 영내 클럽에서 연주가 이루어졌는데, 신중현의 밴드를 제외하면 대부분 외국 곡들을 커버하는 형태였지요. 그러나 연주 수준들은 상당했 습니다. 이런 록 밴드의 생성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악기 수요를 만들어 냈지요. 그리고 1970년대 초 ‘트윈폴리오’ 등의 등장으로 통기타 붐이 일어납니다. 이것 역시 통기타 수요를 폭발시켰지요.  

지난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본디 음악인들이 많이 거하던 낙원악기상가 지역이었는데, 1960~70년대 이렇게 악기 수요가 커지면서 상가 내에 악기상점들이 점점 더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여흥의 문화가 가득했던 지역적 특색과 악기 시장의 성장이 맞아 떨어진 것이죠. 그렇다고 해도 처음부터 지금처럼 악기상점들 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오히려 양품점(옷과 장신구 등의 잡화를 파는 가게)과 가구점이 더 많았죠. 그러다가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본격적인 악기상점의 모습을 띄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상황도 맞아떨어졌습니다. 1982년 1월 6일 자정을 끝으로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자정이 되기전에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마음 놓고 새벽이 되기까지 밖에서 활동을 할 수 있게 됐죠. 그러면서 심야 무대도 활성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무대의 활성화는 밴드와 악사들의 수요를, 더불어서 악기의 수요를 급증시켰지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심야영업이 금지되기까지 이 시장은 최고의 호황을 누렸습니다.이렇게 악기 시장이 커지는 것을 보며 낙원상가도 발맞추어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종류의 상점이 모여있던 것에서 악기상점들 위주로 재편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악기 시장이 커지는 것은 낙원상가에게는 안성맞춤의 기회 였고, 낙원상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체적인 노력을 더함으로써 '낙원 악기상가'로서의 모습을 공고히 만들어 내었습니다.  

악사들의 필수 아지트, 낙원악기상가

1970~80년대 밴드의 발전과 더불어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확연하게 늘어나면서 ‘악사’들도 급증하게 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악기 연주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죠. 당시 연주할 수 있는 무대는 대부분 심야업소들 위주였고, 악사들은 오후부터 모이기 시작해 그날 연주할 곳을 찾곤 했습니다.

  이들이 한 곳에 모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보공유와 펑크 난 멤버를 구하기 위해서였죠. 당시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도 없었고, 전화조차도 그리 대중적인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보를 나누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행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것이었죠. 어느 무대가 좋은지, 요즘은 어디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지 등등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유익의 차원을 넘어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주로 밴드 형태로 무대를 꾸몄는데, 이 때 종종 멤버가 급하게 필요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무대의 성격에 따라 더 필요한 악기가 생기기도 했고, 오히려 악기를 줄여야 하는 경우도 있었죠. 또 전날 술을 진탕 먹고 멤버가 안 나오는 경우도 있었고, 서로 이해가 달라 갈라서는 경우도 있었죠. 여러 가지 이유들로 팀을 급하게 다시 꾸려야 하는 경우들이 늘 발생했고, 이런 경우 수많은 악사들이 한 곳에 모이는 것은 분명 생계를 위해 유리할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악사들이 한 곳에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고, 이러한 모임의 장소가 된 것이 낙원악기상가였습니다. 악기상점이 모여있는 곳이기도 했고,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낙원악기상가만큼 큰 공간을 찾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야외의 공터 같은 곳이 아니고서야 건물 내부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만한 장소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죠. 1980년대까지만 해도 크고 튼튼하고 깨끗한 빌딩들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수백명의 악사들에게 공간을 내어줄 만한 빌딩이 몇이나 되었을까요? 낙원악기상가는 지금 비교해봐도 한 개 층의 넓이가 상당합니다. 수백명의 악사들이 모이기에 낙원악기상가만한 건물이 없었던 것이죠. 낙원악기상가는 그렇게 악기와 악사들과 인연을 돈독히 하게 됩니다. 악사들이 가장 많이 모이던 1980년대에는 하루에 300~500명 정도가 낙원악기상가를 채우곤 했습니다.  

악사들이 모인 것과 관련해서
재미난 기사를 조금만 살펴볼까요?

악사시장의 악사들은 디스코테크에 출연하는 보컬그룹, 카바레에 나가는 캄보 밴드, 룸살롱을 전전하며 손님이 주는 팁으로 살아가는 순수음악을 하다가 배가 고파 나온 아르바이트그룹 등 다양하다. 이들의 나이는 대부분 20대 중반에서부터 30대 후반이지만, 50~60세 된 노장이나 여자 악사들도 가끔 눈에 띈다. 또 악사들의 옷차림새만 봐도 전공이 무엇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다. 퍼머머리에 최신 유행 차림이면 디스코나 펑크음악을 하는 보컬그룹, 덥수룩한 장발에다 개성이 강한 옷차림이면 로큰롤그룹, 단정한 머리에 점잖은 복장이면 캄보밴드나 오부리이다. (경향신문 1983.07.26)  

흐름에 발맞춘 낙원상가의 지속적인 노력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여러 가지 자연적인 흐름과 더불어 의도적인 노력도 곁들여졌습니다. 사실 자연적인 흐름만으로는 지금과 같은 세계 최대 규모의 악기상점으로 자리잡진는 못했을 것입니다. 낙원상가가 악기상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을 꾸준하게 지속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훌륭한 종자의 말도 체계적이고 수준 높은 훈련을 거쳐야만 최고의 경주마로 거듭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이겠지요. 악사들이 생계를 위해 한 곳에 모이는 것이 중요했던 것처럼 악기상점들도 집단상권의 유리함을 생각했을 때 한 곳에 모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특히나 1980년대에 강남의 경제적 상권이 발달하면서, 낙원상가가 쇠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악기상점으로서의 모습을 더 특화시키는 것이었죠.  이에 따라 여러 종류의 상점들이 혼재되어 있던 모습에서 온전히 악기상점들로 재편되는 길을 지속적으로 걷게 되었습니다. 자연적인 흐름에 발맞춘 지속적인 노력 또한 지금의 낙원악기상가를 형성한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이죠.